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흥왕 순수비 (문단 편집) == 역사 == 6세기 중반, [[신라]] 24대 국왕 [[진흥왕]]은 신라 역사상 최고의 [[정복군주]]였다. 진흥왕은 정복전쟁을 벌여 [[경상북도]] 전역과 [[경상남도]] 동부, [[충청북도]] 남부 정도의 영역에 한정된 기존 신라 영토를 가야 전역과 한강 유역, 그리고 지금의 함경도까지 한반도 각지로 확장했다. 그리고 새로 차지한 땅 이곳저곳에 [[순수#s-2|직접 행차]]하여 구구절절 자신의 업적을 칭송하는 [[비석]]을 여럿 세웠다.[* 또한 순수비의 '순수(巡狩)'라는 표현은 [[연호]] 제정과 같이 황제(천자)만이 쓸 수 있었던 용어라는 점에서 전성기 시절 신라의 자부심이 얼마나 컸는지도 알 수 있다.] 순수비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삼국사기》 기록상 551년에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지역인 '낭성'에 순행했다는 기록이 있는 등, 진흥왕은 더 많은 곳을 순수했다. 어쩌면 순수비가 더 있는데 깊은 산 속에 있거나 오랜 세월에 넘어지고 파편으로 남아서 아직 발견을 못 했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포항 중성리 신라비]]가 [[21세기]]에 새로 발견된 것처럼, 오늘날에도 잊혀진 [[금석문]] 발견이 가끔씩 있기 때문이다. 문서 아래에 있는 감악산비처럼 풍화되어 육안으로는 아예 안 보이는 것도 있기 때문에, 거기다 황초령비처럼 조각조각나 있는 상태라면 등산객이 바로 옆을 지나가면서도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다. 순수비의 건립 목적은 단순히 정복 활동 과시에만 그친 것은 아니고, 새로 신라에 편입된 현지 주민들을 교화하기 위해 명망 높은 승려를 대동하며 문화적으로 불교를 전파하는 등 활동도 있었다고 본다. 고대 한국인들이 직접 남긴 기록이 매우 부족한 상황에 순수비에 새겨진 많은 정보는 중요한 사료가 되었고, 훗날 다시 발견하고 그 유래를 분석하는 과정은 한국 금석학의 효시로 평가받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